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대기율 팔항주의 (문단 편집) === 비판적 평가 === > 1948년 4월 린뱌오가 지휘하는 공산당군이 창춘을 포위했다. 그는 최고의 야전군 지휘관으로 여겨졌으며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아울러 무자비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국민당의 창춘방어군 지휘관 정둥궈에게 항복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는 도시를 굶겨서 항복하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1948년 5월 30일에 그의 명령이 떨어졌다. > '''"창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어라."''' > (중략) > 창춘 시민들은 단체로 공산당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기나 어린아이를 병사들에게 맡긴 채 도망쳤고 어떤 사람들은 초소 앞에서 목을 맸다. 그들의 비참한 모습에 병사들은 단호함을 잃었고 일부는 무릎을 꿇고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울면서 이렇게 울부짖었다. > "우리는 단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 암암리에 피난민을 통과시키는 군인들도 있었다. > 상부에서 이 문제를 시정시키자 또 다른 풍조가 발견되었다. '''군인들이 피난민을 때리고, 포박하고 총을 쏴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 > -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32917733|해방의 비극]] 28~31쪽 > "창춘은 마치 히로시마 같았어요. 사상자 수도 대충 비슷했지요. 다른 거라곤 히로시마는 9초가 걸렸고 창춘은 5개월이 걸렸을 뿐이죠." >---- > - 인민 해방군 중위 장정룽 > [[덩샤오핑]]의 주도로 공산당은 대략 500만명 이상의 남자와 여자들, 때로는 아이들까지 징발했다. 덩샤오핑은 마을마다 엄밀한 할당량을 배정하고 명령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엄중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곡괭이와 삽을 든 수백만의 징용자들은 전선으로 식량이나 각종 물건을 지어 나르며 병참 지원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부대의 맨 앞에서 행군하도록 강요받음으로써 '''총알받이로 이용되었다.''' 공산당군 선두에서 비무장 상태의 마을 주민들이 물밀듯 몰려오자 국민당군은 당황했다. 당시 일반 사병으로 국민당군의 참호를 지켰던 린징우는, 적군을 막느라 총을 쏘다가 손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비무장한 일반인에게 총을 쏜다는 사실에 구역질이 났으며 눈을 감으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사격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 > - 해방의 비극 58쪽 > 1968년 12월, 윈난 성 혁명위원회에서 인민해방군 1,000명을 샤디엔에 파견했다. 혁명열에 불타는 이 붉은 전사들은 이슬람을 믿는 촌민들을 무시하고 적대했다. 모스크를 숙박 시설로 삼아 기거했고, 촌민들에게 돼지 사육을 강요했다. 그리고 돼지고기를 먹고 남은 뼈를 마을 우물에 버리기 시작했다. 노골적인 경멸이고 치욕이었다. > 격분한 신도들은 쿤밍에 있는 성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도리어 탄압으로 되돌아 왔다. 반혁명 폭동을 진압한다며 더 많은 군인들을 파병한 것이다. 비극의 절정은 1975년 7월 29일이다. 새벽 3시부터 무차별 포격과 총격이 개시되었다. 소총만이 아니라 대포까지 동원되었다. '''삽시간에 사방은 불바다와 피바다로 변했다.''' 거의 모든 집과 모스크가 붕괴되고 마을은 초토화되었다. 공식기록으로 7,700명 주민 가운데 9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사후에 병사한 이들까지 합하면 두 배가 넘는다고 한다. 즉사한 900명의 희생자 가운데 기사 아저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와 누나 등 일가족 9명도 있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매일 같이 기념비에 들려 기도를 드린다고 했다. 그가 18살 때 경험한 비극이다. >---- > -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윈난 : 이슬람 중국'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2988|#]] > 티베트 전쟁 내내 중국 인민해방군이 보인 잔학무도함은 너무나 심각해서, 수년동안 티베트 공산당 지도자였고 티베트 민족정치자문의원회의 부회장이라는 중책에 있던 푼촉 왕걀마저 중국군이 저지르는 잔학 행위에 항의했다가 티베트인의 자유 투쟁에 동정을 표했다는 명목으로 투옥되었다. > 또한 라싸에 주둔했던 중국 인민해방군 포병대 지휘관이었던 청호칭 대령은, 아군이 저지르는 끔찍한 학살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티베트군으로 전향해 버렸다. 청 대령은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미군과 싸웠고, 티베트로 파견되어 군인으로 몇 년을 더 복무했다가 티베트 저항군에 가담하여 예전의 동료들과 싸웠다. > 그는 티베트 동부 지방인 캄과 암도에서 일어난 티베트 저항군과 중국군과의 전투로 인해 약 4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죽었으며, 중국군 수뇌부에서 더 이상 티베트인들의 봉기를 막기 위해서 티베트인들에게 주는 식량 배급을 줄이고 통제를 강화하고 더 긴 시간 동안 노동을 시켜야 한다고 작성한 기록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 청호칭은 롭상 타시라는 티베트식 이름도 얻었는데, 중국군의 탱크와 비행기가 티베트 민간인을 노리고, 티베트 마을들이 중국군 폭격기에게 폭격당하는 장면도 목격하였다. 청 대령은 인도에서 티베트 난민으로 여러 해를 살다 타계했다. >---- > - 티베탄 리뷰 1979년 10월 호 > 1989년 6월 4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천안문 광장에 집결해 있던 학생과 일반시민에 대해 중국 인민해방군이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하고 전차로 역살하는 등 무력탄압해 다수의 사망자를 냈다.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000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 당시 진압군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산둥성 텅저우 거주 장스쥔은 2009년 홍콩의 빈과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진압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 '''“나는 [[공보정훈병|정치 선전원]]으로 지정돼 [[비전투병|총기를 받지 못했다]]. 당시 우리들의 구호는 ‘인민을 부모로 보고, 학생을 자매로 보라'였다. 우리는 인민을 부모로 본다는 군대가 결국 [[천안문 사태|중화민족 최대의 비극]]을 저지를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 '''"머리에 흰띠를 두른 학생들이 피범벅이 돼 눈 앞에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마오쩌둥 기념관 우측 사거리에서 한 무리의 군인들이 나무몽둥이와 가죽띠로 시민들을 구타하는 것을 봤다.”''' > 당시 진압에 참가한 54군단 소속 지휘관들은 작전 후 일괄 승진했다. 주차오성 군단장은 허난성 군구 사령관으로 승진했고, 당시 사단 정치위원이었던 왕위파는 후에 홍콩주둔부대의 정치위원으로 승진한 뒤 나중에 광저우 군구 부정치위원을 맡았다. >---- > - 중앙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3533132|천안문사태 진압 병사가 입을 열다]] > 2011년 12월 2일, 중국 란저우에서 성난 민중들이 군용차량을 전복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란저우군구 사령부의 차량이 난폭하게 정차한 후 6명의 군인이 차도를 점유하고 있던 노점상들을 구타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격노한 란저우 시민 1,000여 명이 주위를 포위하며 군용차량을 전복시켰다. > 몇 시간 후 란저우 현장 사진과 소식이 인터넷에 올라왔다.[[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oreapower35&logNo=140204579331|#]] 한 란저우 시민은 “방금 봤는데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었다!”라고 했고, 또 다른 란저우 시민은 “군용차량의 난폭운전은 진작부터 민원을 제기했었다. 경찰도 감히 제지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민중들 스스로 (차량을) 전복한 시킨것이다!”라고 했다. >---- > - NTDTV[[https://www.ntdtv.com/b5/2011/12/04/a626804.html|#]][* Asia Times 같은 영자지에 심심찮게 중국군이 민간인에게 행패를 부린 사건들이 올라온다. 한 예로 중국에서 군 소속 및 군 소유기업의 차량은 백색번호판을 달고 다니는데, 이들 차량의 횡포가 많은 원성을 사고있다. 이 백색번호판 차량들은 고속도로 통행료는 물론, 주차요금도 내지 않고, 과속 난폭운전을 일삼는다. 이 와중에 인명 사고를 일으켜도 처벌 받는 일은 거의 없다. 일부 부패 장교들은 민간인에게 이 백색차량번호판을 뇌물받고 팔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 '''수용소에 있던 포로 일부는 손이 뒤로 묶인 채 살해되었고, 부상당한 포로들은 수류탄 혹은 몸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 태워 죽였다.''' > 중공군에게 잡힌 UN군 포로 중 건강하거나 걸을 수 있는 상태의 부상자들은 수용소까지 걸어갔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들은 '''그 자리에 버려두고 가거나 총살시켰다.''' 포로들이 죽은 이유는 대부분 위생관리 부재, 식량 부족, 이질, 폐렴 등이었다. '''중공군들은 소량의 식량을 주거나 아예 주지 않았고, 배급된 식량 또한 영양가가 없었다.''' > 또 중공군은 포로들을 '''자그마한 철장에 가두고 살을 에는 추위에 맨발로 서 있게 하거나 찬물에 몸을 담갔다 빼게 하곤 했다.''' 적군은 '''포로들을 두들겨 패고 물로 가득한 구덩이에 한동안 집어넣기도 했다.''' > 죽음의 수용소들 중 한 곳은 '동굴'이라는 이름의 수용소였다. 이곳에 보내진 포로들은 담요도 없고, 화장실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활했다. 벨리 아타소이 병장은 이러한 포로수용소들 중 한 곳인 450m짜리 터널에서 며칠을 지냈는지 모르며, 이틀에 한 번 주 모래 섞인 보리밥을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 > - '터키인이 본 6.25 전쟁' 지음 : 알리 데니즐리, 옮김: 이선미, 감수 이난아 > 중공군은 부상 당한 나를 다른 포로들과 함께 차에 태우고 새끼줄로 묶었다. 차는 여차하면 전복 될 것만 같았다. 자동차 바퀴는 울퉁불퉁한 돌 길 위를 지나갔다. 부상자들 중 자동차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떨어진 사람은 다시 차에 태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총을 쏴 죽여 버렸다. '''중공군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흑인 미군 한 명이 떨어졌다. 그는 밧줄을 붙잡고 차 뒤에 질질 끌려오다가 힘이 빠지자 그 줄을 놓았다. 중공군 중 한 명이 그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그러다 중공군 한 명이 내게도 총을 발사했다. 총알이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머리에 닿을 듯 지나갔다. >---- > - 터키군 무자페르 쉔부르치 하사의 증언 > 장진호 전투 제 3 일 째인 11월 30일 저녁까지 사망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으나 땅은 얼어 붙어서 파지지 않았다. 시체들은 잘라 놓은 목재처럼 세 겹, 네 겹으로 쌓아 올려졌다. 12월 1일 오후 1시를 기해 포위 돌파전은 오후 늦도록 일대도살극을 연출했다. 이날 오후 늦게 대열이 유린 되자 '''중공군은 부상병들이 실려 있는 트럭으로 기어 올라가서 무력하게 누워 있는 아군 부상병들을 쏘고, 찌르고 했다.''' 또 어떤 차에 휘발유를 끼얹어 '''부상병들을 산 채로 불태우기'''도 했다. 대열을 벗어나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명백하고 완전한 살인이었다. 나는 열두 평생을 살아도 다 하지 못할 너무도 많은 아픔과 피, 죽은 자와 다친 자들을 보았다. >---- > - 미 육군 7사단 제임스 블롬 하사의 증언 국공내전 기간 동안의 삼대기율 팔항주의에 대해서 지나친 고평가가 이뤄지면서 빠가 까를 만드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예컨대 삼대기율 팔항주의가 민심을 확보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많지만 이 민심이 그동안 중국공산당이 수십년간 홍보했던 것처럼 절대적이었냐는 것에 대해선 의문을 표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위의 사례는 [[6.25 전쟁]] 사례가 아니거나 타 인종의 연합군 포로인 것으로 보아 민간인 한정으로는 엄격하게 지켜졌다는 주장도 있으나, [[6.25 전쟁]]을 겪은 노인 세대의 증언 중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이 동리에 와서 닭 잡아가고 소 끌고갔다는 증언이 차고 넘치는 것으로 보아 타당성이 떨어진다. 한국전쟁외에 후대 사례들 혹은 중국내부 기준으로는 복잡한 요인이 존재한다. 실제로 비교적 군율이 엄격했다던 국공내전 기간에도 중국 공산당군이 위기에 처하면 민중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삼대기율 팔항주의의 정신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 무자비한 강제징집과 사실상 약탈에 가까운 강제적 물자공출 등 민간인을 쥐어짜기 일쑤였다.[* 군자금 마련을 위해서 아편을 대량으로 거래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상황이 어느 정도 호전되면 다시 군율이 엄격해지긴 했다. 당시 중국은 공산당, 국민당, 지역 군벌 등등 수많은 세력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던 현대판 삼국지, 난세였고 이 와중에 이런 규율조차 갖고 있지 못한 수많은 무장집단들이 보통사람들 상대로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그런 집단들에 비하면 공산당군이 비교적 나은 편이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중공군이 항상 친절하거나 제네바 협약을 잘 지킨 것도 아니며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 전쟁에서는 교묘한 방법[* 심리적 압박으로 공산주의 이념을 세뇌시켜 공산주의자로 전향시키기, 중국군 여군으로 미인계로 세뇌시켜 중국군으로 전향하게 하여 중국에 눌러앉히기 등.]으로 포로들을 세뇌시켜 자국 군대의 장병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중국 국민으로 국적을 변경시켰다. 이는 포로의 신변은 둘째치고 엄연히 납치 행위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각설하고 마오쩌둥의 집권 후반기에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등 굵직한 사고가 터지기 시작하면서 이 규율도 단순한 군율이 아닌 마오쩌둥 우상화에 악용되기 시작했고, 팔항주의의 5번 항목을 유권 해석해 [[홍위병]]들에게 쪽도 못쓰고 당하거나 그들의 만행을 팔짱 끼고 방조하는 등 [[흑역사]]까지 연출되기에 이르렀다. ~~애초에 제대로 지켰으면 천안문의 시민들을 전차가 깔아 뭉개진 않았겠지~~ 물론 이러한 규율이 있는 것만큼, 어느 정도 지키려는 노력을 했을 확률은 충분히 존재하기에 희석되는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도 국공내전과 중일전쟁 당시 중국 국민당의 국민혁명군과 일본 제국의 일본군의 만행이 압도적이라 굳이 비교하는 사람은 적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